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문단 편집) === 프리무스 재판 === 기원전 24년 말 또는 23년 초, 마케도니아 전임 총독 마르쿠스 프리무스가 [[원로원]]의 승인 없이 로마의 동맹국인 [[트라키아]]의 [[오드뤼사이 왕국]]과 전쟁을 벌인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프리무스의 변호를 맡은 무레나는 그가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오드뤼사이 왕국을 공격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더해, 프리무스는 그 명령이 아우구스투스의 명백한 후계자인 마르켈루스로부터 온 것이라고 증언했다. 이 증언은 원로원 전체를 발칵 뒤집어놨다. 당시 로마의 [[속주]]는 외적의 침략에 노출되어 '프린켑스'의 특별 관리가 필요한 속주와 원로원이 자체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속주로 분리되었는데, 마케도니아 속주는 원로원이 관리하는 속주에 속했다. 그 속주의 총독이 아우구스투스의 지시를 받들어 전쟁을 벌였다면,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게 권력을 넘겨주겠다던 기원전 27년의 선언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이었다. 이것만 해도 의원들이 불만을 품을 일인데, 총독에 대한 어떠한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는 조영관인 마르켈루스가 총독에게 전쟁을 단행하라는 지시를 임의로 내렸다고 하니 다들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고 증인으로 소환되지 않았는데도 재판에 출석했다. 그는 증언석에서 선서 후 자신의 명예를 걸고 프리무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며 마르켈루스 역시 그런 바 없다고 주장했다. 무레나가 이에 분개해 소환되지 않은 재판에 참석한 이유를 말해달라고 다소 거친 어투로 묻자, 아우구스투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로마의 공익을 위해 여기에 왔소." 그 후 프리무스는 유죄를 선고받고 추방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다룬 후대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이 재판에서 무죄에 투표한 배심원들이 상당했다고 밝힘으로써, 당시 사람들이 아우구스투스의 주장을 신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후 원로원 내부에서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반감은 고조되었고, 로마 시내에서도 아우구스투스의 모순적인 행보를 지적하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주의자들을 달래기 위해 기원전 23년 11번째로 집정관에 취임하면서 동료 집정관으로 과거 카이사르와 자신에게 맞서 싸우다가 사실상 은퇴해 공화정파의 존경을 받고 있던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기원전 23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선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